조기종결(foreclosure)의 유혹 책과 소통하다

에릭슨(Erikson)은 그의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에서 자아의 발달 과정을 8단계로 나누고, 그 중 다섯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청년기가 통상 가장 극적인 생리, 심리적 변화를 수반한다고 보았다. 이 시기의 심리적 과제는 정체감(identity)의 형성이다. 에릭슨은 이 과제의 수행방식을 네 가지 유형으로 정리하는데, '정체감 성취', '유예(moratorium)', '조기종결(foreclosure)', '정체감 혼미'가 그것이다.(*) 첫번째 유형인 '정체감 성취'는 두드러진 갈등이나 혼란 없이 정체감을 자연스럽게 성취해내는 것을 의미하고, 네번째 유형인 '정체감 혼미'는 정체감을 성취해내려는 노력없이 혼란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두번째 유형인 '유예'와 세번째 유형인 '조기종결'이다. '유예'는 탐색과 시험을 계속하지만 결정을 향한 가시적인 진전이 없는 상태이다. 당대의 통념에서 벗어나는 위대한 사상적 진전을 이룬 많은 인물들이 통상적인 경우보다 상당히 긴 유예 상태를 거치면서 방황하였다. 유예 상태에서는 정체감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좌절되므로, 많은 경우 강박적인 집착과 불안이 수반된다. '조기종결'은 유예 상태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과 부모의 가치나 목표에 추종하려는 욕구에 굴복하여 차선적인 선택을 하게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조기종결'은 스스로 찾아낸 대답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따라서 '조기종결'은 타인으로부터 주어진 대안, 즉 "부모가 기대하는 바"이거나 "사회적으로 가장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는 인생모델"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대안에 대한 뚜렷한 확신 없이 시기상조적 결정을 내리고 그것이 자신의 정체감이라고 자기최면을 걸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조기종결'로 형성된 정체감은 필연적으로 취약성을 내포한다. 취약한 정체감을 지켜나가려는데는 끊임없는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하며, 따라서 위기상황에 닥쳤을 때 자아는 쉽게 무너져 내린다. 이 경우, 자아는 다시 '유예'의 상태로 복귀하고 다시 한번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이라는 고통에 노출된다. 이때 자아는 끝까지 '유예'의 고통과 싸워 스스로의 답을 찾아낼 것이냐, 아니면 제2의 조기종결로 불완전한 안정에 안착할 것이냐 사이에서 또 다시 방황하게 된다. 애초에 '조기종결'을 선택했던 것은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견뎌내는 자아의 능력(capacity)과 관련이 있으므로, 한번 '조기종결'을 선택했던 사람은 또 다시 '조기종결'을 선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아의 능력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언제나 수축되거나 확장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아에게는 언제나 다른 결정을 내릴 잠재성이 내포되어 있다. '유예'와 끝까지 싸워 이겨내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 이루어낸 정체감을 획득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제이다. 자아가 제2의 '유예'에 노출되었을 때, 그에게는 제2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마일 제2의 '조기종결'을 선택해버린다면 제3의, 제4의 유예가 찾아올 위험을 선택하는 것과 다름없다. 단 한번, 그 과제를 성취해내지 못한다면 그는 평생 불완전한 유예-조기종결의 싸이클안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 민경환의 <성격심리학>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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