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 ![]() 김상봉 지음/꾸리에 |
이 책의 골자를 이루는 핵심적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주식회사는 동산도 부동산도 아니며, 인간으로 이뤄진 공동체다. 고로 본질적으로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소유주가 아니라 대표자만이 있을 수 있는데, 주식회사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성원은 주주가 아니라 노동자이므로, 대표를 선출할 권리는 노동자에게 있다."
나는 이 주장에 깔린 윤리적 원칙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 주장을 지탱하고자 제시하는 논리 중 상당 부분은 반론을 펼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그런 부분들을 몇 가지 짚어보려고 한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나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기본적인 방향에도 동의한다. 그리고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둘러싼 신화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점에서 박수를 아끼지 않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다른 어떤 책보다 이 책을 공들여 읽었으며, 악마의 변호사가 된 마음으로 조목조목 따져보았다. 이 글은 나의 그런 내적 토론의 요약인 셈이다.
우선 주주는 주식회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식을 소유하는 것일 뿐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사실 이 주장은 법리적으로는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는 논리로 딱히 새로울 것은 없다.(물론 일반인의 인식이 그 법리적 논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현실이니,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주식은 무엇인가? 주식은 단순히 자본을 쪼갠 것이 아니라, 표준화된 하나의 계약이다. 여기서 표준화라 함은 매 건의 계약이 계약 당사자 간의 합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계약의 형태를 미리 규정해 놓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주주의 권리는 법이 정의하는 주식이라는 계약상의 권리라고 보는 게 옳다. 상법을 보면 주주의 권리를 다음의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이익의 배당, 둘째, 잔여재산의 청구, 셋째, 의결권이다. 의결권은 주주총회에서의 의결권을 의미하며, 상법은 나아가 주주총회의 의결로 결정해야 하는 사항을 규정하는데, 주주의 재산권과 기업 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고로 이 의결권을 경영권이라고 크게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게 이 세 번째 요소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주식이라는 분할된 자본의 본성상, 첫째와 둘째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마땅하나 세 번째 권리는 주식의 소유권에서 연역 해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p262).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주주의 이익 배당권과 잔여재산 청구권은 기업에 대한 다른 모든 청구권자(여기에는 노동자도 포함된다) 이후에 행사할 수 있는 권리다. 다른 이들이 모두 정해진 몫을 챙기고 난 후 맨 마지막에 남는 것을 챙길 권리가 있는 자에게 전체 파이의 운영을 맡긴다는 생각은 충분히 연역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전체 파이의 크기를 크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자에게 그럴 권리를 주는 것이 경제적으로 합당하다는 논리다. 저자는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 주식회사의 본질상 주식의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없기 때문(p170)"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잔여재산을 소유한 자에게 전체 재산을 통치할 권리를 준다는 것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다만 문제는 통치의 대상인 전체 재산에 다른 인격체인 종업원이 포함된다는 것일 뿐이다. 즉 그 범위의 규정이 문제라는 이야기다). 저자는 주주가 고작 잔여재산청구권을 가진 자일 뿐인데 어찌하여 소유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주장하는데(p174), 사실 관계상 틀린 점은 없으나 두 사실을 잘못 연결하고 있다. 실제로 주주의 경영권은 주주가 기업을 소유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그건 사람들의 인식일 뿐이다), 고작 잔여재산청구권밖에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즉 "잔여재산밖에 청구할 수 없으면서 어찌 경영권을!"이 아니라, "잔여재산밖에 청구할 수 없기 때문에" 경영권을 주는 것이다. 또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현실적 실행에서 소유 행위와 경영 행위의 분리를 일컫는 것이지,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소유권과 경영권이 분리된다(p171)"는 의미는 아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저자는 기업경영의 독립성을 위해 사외이사를 두는 제도를 들어 주주 통치의 비논리성을 공격하는데, 나는 이 또한 동의하지 못하겠다. 여기서 기업경영의 독립성이란 주주 일반으로부터의 독립성이 아니라 일부 대주주로부터의 독립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외이사를 두도록 강제함으로써, 대주주가 이사회를 장악하는 것을 막고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사를 선임할 수 없는 소액주주를 배려하려는 제도다(물론 사외이사 제도가 그 기능을 충족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현실적 실효성은 여기서 별개의 문제다).]
물론 연역적으로 추론 가능한 논리라고 해도, 우리는 이 논리를 '윤리적' 관점에서 반박할 수 있다. 경제적 논리가 어떻든 간에 한 인간에게 다른 인간을 통치할 권리를 줄 수는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재반박은 우리가 흔히 듣는 이야기다. 노동 계약을 통해 노동자 본인이 '자유로이' 그 권리를 주주가 통치하는 회사에 위임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 '자유로이'라는 부분에서 무너진다. 그들이 좋아하는 논리로 받아쳐 주자. 과연 현재 노동시장의 현실이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공정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효율적' 시장인가? 여기에 더해 "오늘날 기업의 노동이란 단순히 자기 인격의 일부를 구성하는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삶 전체를 저당 잡히는 것이 되어버렸다(p128)"는 현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양자가 '자유로이' 맺은 계약이라도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계약이란 게 있는 법이다.(예를 들면, 장기 매매나 마약 거래가 그러하다.) 더구나 애초부터 불공정한 계약이라면 계약 자체가 유효하게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에게 경영권을 주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기는 어렵다. 윤리적 문제는 노동 시장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법적 장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및 실업수당 인상 등을 통해 노동자가 ‘자유로이’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면 그만 아니냐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윤리적 논리뿐 아니라 경제적 논리를 함께 펼쳐야만 주주 경영권에 온전히 반박할 수 있다. 주주 경영권에 대한 경제적 관점에서 반박을 펼쳐 보자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볼 수 있다.
(1) 어떤 목적을 가장 잘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목적에 자신의 이해관계가 잘 부합하면서, 동시에 그럴 능력과 수단을 가진 사람이다.
(2) 여기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주가 부양이거나 단기적 배당의 확대라면, 이 목적은 주주의 이해관계에 가장 잘 부합할 것이다. 하지만 목적이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시장에서 제 역할을 하며 지속가능한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이 목적은 주식을 내일이라도 팔아치울 수 있는 주주보다 일자리를 쉽게 옮길 수 없는 종업원의 이해관계에 더 잘 부합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목적의 상충, 이해관계의 상충을 보게 된다. 까다로운 문제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주주의 이해관계가 종업원의 이해관계보다 '더' 기업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간단히 결론지을 수 없다는 점이다.
(3) 주주의 이해관계가 기업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치더라도, 주주는 둘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기업의 목적을 단순히 이익 최대화라고 본다 해도,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업 행위는 종업원에 의해 행해진다. 고로 주주(공동체)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하는 최선은 종업원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대리인을 세우는 것이지만, 종업원(공동체)은 그 자신이 스스로 그 업무를 수행하면 그만이다. 둘 중 어느 쪽이 효율적인가는 아주 명백하다.
여기에서 다시 윤리적 관점으로 주주의 권리에 대해서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통치의 주체와 통치의 대상이 일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데모스 스스로 자신을 통치한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모든 권력은 권력 행사의 대상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일 경우에만 정당하다(p116)"고 표현하고 있다. 기업 경영에서 권리 행사의 대상은 물론 노동자이기도 하지만, 주주가 투자한 자본, 즉 주주의 재산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주의 재산을 종업원이 일방적으로 통치하는 것 역시, 주주가 그 권리를 위임하지 않는 한 비민주적이며 비윤리적인 일이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따라서 (2)에서 제시한 주주와 노동자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문제, 그리고 주주의 재산 역시 기업 경영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라는 주장은 완전히 납득하기 어렵다. 저자는 "나라의 시민들이 자유로운 주권자이듯이 노동자들 역시 기업의 주권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기업의 소유권이 아니라 경영권이다.(p107)"라고 말하는데, 정해진 이익이나 재산이 아니라 잔여 이익과 재산만을 청구할 권리가 있는 주주를 주권자에서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일치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반하는 일일 것이다. 결국 주식으로 규정되는 위험자본의 존재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경영권을 고이 노동자의 손에 들려준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아서 문제이기 이전에 윤리적으로도 그리 옳은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물론 그 상태가 노동자에 대한 통치를 주주의 손에 일임한 지금보다 '더' 비윤리적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결국 주주자본에게서 경영권을 완전히 떼어내려면, 잔여재산권밖에 갖지 못하는 주주자본을 대체할 새로운 자본이 필요하다. 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도 틀린 말이며(다시 한 번, 경영권은 소유권에서 온 것이 아니다), 윤리적으로고 공정하지 못하다.
다시 주식이 내포한 계약상의 권리로 돌아가 보자. 저자는 어찌하여 인간으로 이뤄진 공동체인 기업을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자가 통치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지만, 사실 대답은 간단하다
"돈을 냈으니까." (물론 저자가 이 사실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국 이 문제는 정확히 노예에 대한 유비로 돌아간다. 노예를 소유하여 부리는 사람에게 "어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통치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묻는다면, 아마 노예의 주인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내가 어제 돈 주고 샀으니까요!!!!"
어찌 보면 나무랄 데 없는 논리다. 내가 그 권리를 얻고자 돈을 치렀다. 고로 나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 (실제로 경영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주식의 가격은 다르게 매겨진다. 일례로, 주식 시장에서 거래되는 한 주의 보통주와 기업 인수/합병 시장에서 거래되는 대주주의 지분은 값이 다르게 매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역사의 흐름에서 노예를 사고파는 행위는 사라졌다.(적어도 법률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행위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이 노예와 노예주인 간의 협상 덕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너무 자연스럽던 일이 더 이상 자연스럽게 여겨지지 않게 된 세계관의 변화, 윤리의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수많은 이가 피를 흘렸고, 혁명이 있었고,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노예 주인에게서 재산(=노예)을 강탈하는 "재산권의 침해" 과정이 단 한 번은 일어나야 했다. 아마 주식회사의 경영권 문제에서는 “재산권의 침해”라기 보다는 “계약상 권리의 침해”라고 표현하는 게 기술적으로 더 옳을 것이다. (사족인데, 결국 이 문제는 경제학의 문제도, 법학의 문제도 아니고, 세계관과 윤리의 문제다. 따라서 이 문제를 논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철학자라는 이야기는 맞는 것 같다.)
의결권/경영권을 얻고자 돈을 치른 이들(혹은 돈을 치렀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한, 경영권을 노동자의 손에 쥐어주는 일은 “계약과 재산권을 둘러싼 신화”를 깨뜨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신화는 현실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어, 신화를 깨뜨리는 망치가 결국 현실의 일부까지 깨뜨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기존 기업의 자본 구조가 깨어질 첫 번째 현실이 될 것이다. 잔여재산청구권밖에 없으므로 그 대가로 경영권을 가진 주주자본에서 경영권을 떼어내려면 주주자본을 대체할 새로운 클래스의 자본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므로. 그 과정이 평화롭기만 할 것이라는 기대야 어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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